넷플릭스 오리지널 <선과 악의 학교>의 줄거리, 결말 등에 관한 정보는 여기로:
폴 페이그와 인종차별적 페미니즘
여성 배우들과 여성 캐릭터로 극을 이끌어가는 것으로 유명한 폴 페이그 감독은 이번에도 거의 신예인 소피아 앤 카루소와 소피아 와일리를 투탑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재미있게도 두 주연 배우의 이름 모두가 소피아인데 스펠링이 다르고, 두 주인공 배역 중 하나의 이름도 소피다).
그리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이자 PC주의자로 포지셔닝하는 폴 페이그의 페미니즘에 대한 1차원적 이해는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폴 페이그 식의 페미니즘은 단순히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상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남성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형태로 작동한다.
즉, 폴 페이그의 영화 속 모든 남성들은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찌질하거나, 사악하거나, 무능력하거나, 적어도 어떤 형태로든 비웃음의 대상이어야 한다. 반면 주인공인 여성은 정의롭고 유쾌하며 유능해야 한다. 그의 대부분의 영화 속 남성은 어떤 극복되어야 할 남성적 특질(가부장적, 불통, 감정적 몰이해 등)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남성이어서' 비웃음과 극복의 대상이 된다.
폴 페이그는 남성과 여성의 성 대립을 1차원적인 선과 악의 대립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남성과 동등한 성으로서의 여성이 남성과 함께 사회를 발전시키고 구성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은 도태되어야 하고 배제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페미니즘이 폴 페이그의 영화 도처에서 그다지 부끄러움도 없이 낯짝을 드러낸다.
그의 대표작 중 <스파이>에서 주인공 수잔 쿠퍼(멜리사 맥카시 분)은 '뚱뚱하고 못생긴 여성이지만' 정의롭고 유능하며, 반대로 짐짓 잘생기고 능력 있어 보이는 그의 동료 브래들리 파인(주드 로 분)이나 릭 포드(제이슨 스타뎀 분)는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허당이거나 인간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물들이다. 영화를 똑같이 1차원적으로 보는 PC주의에 경도된 일부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고스트버스터즈(2016)>에서 그가 영화 속 주요 배역 중 거의 유일한 남성인 케빈(크리스 햄스워스 분)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그는 여지없이 띨띨하고 무능한 배역=남성이라는 공식을 고수한다.
물론 그의 팬 일부는 그가 이렇게 젠더 이슈를 다루는 방식이 일종의 남성우월주의자들에 대한 미러링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로파간다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과연 미러링이라는 방식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둘째치고라도, 특정한 유형의 인물상이 아니라 아예 남성이라는 성 전체를 항상 영화 내에서 멍청하고 무능하고 도태되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방식이 과연 도덕적으로 옳긴 한 것인지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이런 태도가 과연 상대를 대화와 설득 나아가 조화로운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한남충'으로 몰고 가는 일부 극단적 페미니스트(솔직히 나는 그것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다른 형태의 인종차별주의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와 무엇이 다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의 영화 <스파이>는 내 인생 코미디 영화 중 하나이고, 독특한 질감의 스릴러 <부탁 하나만 들어줘>도 상당히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그래서 가끔 그의 영화가 이렇게 멍청하고 1차원적인 페미니즘을 거칠게 드러내고 나올 때마다 정말 아쉬움을 감출 길이 없다(물론 전술한 것처럼 저 두 영화에도 그의 사상적인 문제점이 거의 그대로 드러나긴 한다. 그의 연출방식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이런 유치하고 유아론적인 페미니즘과 PC주의가 한껏 묻어 있어서 영화의 만듦새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그 결점이 너무나 눈에 띄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폴 페이그의 인종차별적 페미니즘에 대한 집착은 거의 강박적이다. 그리고 <고스트버스터즈>와 아래에서 살펴볼 바와 같이 이 영화에서도 그렇듯 과연 그런 태도가 그가 '지지한다'는 페미니즘의 건강한 발전에 과연 도움이 되는 건지 심각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 영화, 선과 악의 학교에서도 그의 1차원적 PC주의 내지 페미니즘은 여전하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이자 선역은 모두 여자이고, 선과 악의 학교 각각을 관리하는 학장(교장 바로 밑의 교감에 해당하는 직책)도 모두 여자이다. 그녀들이 타도해야 할 대상인 라팔은 (당연하게도)남성이며, 심지어 그녀들의 연애의 대상이지만 가부장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영웅' 테드로스 역시 남성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는 라팔을 뺀 다른 남성들은 무력하거나 평면적일지언정 무조건적인 배척이나 기피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이 다행히 진일보했다고 평가될 수도 있기는 하다.
아래에서 보듯, 그에 비례해서 그의 PC적인 면모는 한참 퇴보했지만 말이다.
영화 속 PC주의의 한계
폴 페이그는 기본적으로 여성이 주도적으로 활약하고 당당한 여성이 나오기만 하면 PC이고 페미니즘이라고 착각하는 감독이다. 그는 이 영화 선과 악의 학교에서 대립하면서 성장하는 두 주인공 소피와 아가사를 설정하면서, 두 주인공 모두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성들이니 PC적인 면모는 이걸로 다 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이런 언뜻 봐서는 PC적인 배역 설정과 별개로, 감독은 영화 내내 '추함'과 '악함'을 동치시키고, '아름다움'과 '선함'을 동치시키면서 PC적으로는 몇십 년은 퇴보한 듯한 구성을 보여준다.
물론, 그가 명시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수업의 일종으로 배우는 선의 학교를 풍자하고 악의 학교에 몸담고 있지만 아름다운 소피를 조명하면서, 사실은 선함=아름다움, 악함=추함의 등식이 성립하지는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반부 완전히 악으로 돌아서는 소피의 용모가 점점 추해지는 모습(동화 속 늙은 마녀처럼 매부리코가 되고 사마귀가 나면서)을 보여주며 영화는 그러한 메시지를 완전히 부정해 버린다. 실제로 선의 학교의 학생들이 내면적으로는 얼마나 타락해 있든 영화 속 선의 학교의 학생들은 내내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지며 악의 학교의 학생들은 어딘가 모두 추하고 거부감을 일으키는 인상으로 비춰진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후반부 선과 악의 무도회 장면에서, 선의 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남녀가 커플을 이뤄 춤을 추지만 악의 학교의 학생들은 남남 커플도 있고 여여 커플도 있는 등 자유로운 커플을 이뤄 춤을 춘다. LGBTQ=악이라는 것인가? 감독의 의도는 '선의 학교라고 선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고, 악의 학교라고 악인만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나보지만, 영화 속 악의 학교의 학생들은 실제로 사악하고 선의 학교 학생들은 위선적으로 사악하기 때문에 그냥 모두가 사악하게 보일 뿐이다.
또한, 분명히 선과 악의 학교 각각에는 남녀 학생들이 골고루 다니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선과 악의 무도회 직후 선과 악의 학교간 대결 시퀀스에서 공격을 하는 선의 학교 쪽 학생들은 모두 남자만 보이고 악의 학교 쪽에서는 주로 여성이 싸우는 장면도 이상하다. 감독이 남성과 여성간의 대립을 여전히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1차원적 인식으로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장면이다.
감독의 의도는 결국 세상은 선악으로 명백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계속해서 아름다운 선의 학교와 추악하고 무시무시한 악의 학교를 대비해서 보여주는 연출까지 영화는 계속해서 관객이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로 인물들을 구분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에(실제로 악의 학교 쪽 인물들이 훨씬 사악하고, 선의 학교의 인물들은 사악하다기보다는 그냥 지질한 것에 더 가깝기 때문에 선의 학교도 완전히 선하지는 않다! 라는 주장에 별로 힘이 실리지 않는다) 마지막 전투씬이 선과 악을 가릴 수 없는 무도한 사회의 단면이라고 읽히기보다는 단순한 선과 악의 대립처럼 보인다. 그 전투 전 악의 학교에 몸담은 소피의 행동이 누가 봐도 명백히 더 심각한 악이라고 묘사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결국 감독이 주인공 중 아가사의 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라는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는 내내 이분법적 관점으로 아름다움과 선함을 동치시키고 추함과 악함을 동치시킨다. 이러한 인식의 당부를 떠나서, 스스로 PC하다고 자부하기를 마다않는 감독의 연출 방식 치고는 굉장히 구닥다리인데다가 PC하지도 않은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영화의 중심 소재가 이렇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기 때문에, 영화는 선과 악에 관한 기존의 클리셰를 끊임없이 비틀고 해체하고 싶어하면서도 그 어떤 영화보다 식상하고 지루한 클리셰로 돌아온다. 이런 뻔하고 재미없는, 누구나 아는 내용을 짐짓 참신하게 전달한다고 착각하면서 영화는 무려 2시간 28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총체적으로 저질스러운 영화에 2시간 28분이라는 시간이 허락됐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이미 넷플릭스가 되는 대로 제작비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입증된 바 있다. 따라서 넷플릭스가 조건반사적으로 침을 흘리는 PC스러움이라는 소재를 들고 온 감독의 제안을 쉽게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시:
폴 페이그, 이제 그만 은퇴하시길
폴 페이그는 남자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면서 자신의 모든 영화에 끊임없이 똑같은 젠더 대립 구도를 가지고 온다. 그 장르가 스릴러이든 코미디이든 액션이든 호러든 상관 없이 말이다.
이제까지는 그의 그런 시도가 재미있는 결과물을 낳을 때도 꽤 있었다(<스파이>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 등). 하지만 이 2시간 38분짜리 쓰레기는 그의 연출 역량이, 그리고 그의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젠더 갈등 요소의 무비판적 삽입 능력이 완전히 끝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 대한 내 평점은 ★. 연출의 측면에서도, 미적인 측면에서도, 이야기의 측면에서도, 주제의 측면에서도 단 하나도 호평할 거리가 남지 않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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