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의 기록들

라스트 오브 어스와 평론에 대하여

by Doolim 2020. 7. 7. 16:29
반응형

라스트 오브 어스를 못 깨 본 사람의 라스트 오브 어스2에 대한 감상

참고로 나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1도 깨지 못했다. 내가 플스4를 사고 첫 번째로 플레이한 게임이었는데, 그 때는 조작감에도 익숙하지 않았고 선천적으로 잠입게임에는 소질이 없어서(내가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무쌍화되기 시작한 오딧세이부터 시작한 것은 참 다행인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몇 번 클리커한테 끔찍하게 목을 물어 뜯기고 패드를 내던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나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스토리에 대해서 별로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최근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와 관련된 흥미로운 현상에 대해서는 조금 할 말이 있다. 이번에도 결국은 인지능력의 한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지능력과 객관적 평가의 한계

인간의 인지능력은 매우 광범위하게 제한적이다. 인지능력의 한계는 단순히 실시간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인지능력의 한계는 시간적으로도 기능한다. 즉, 인간의 인지능력은 현재를 기준으로 최근의 과거와 근접한 미래 정도까지만 미친다. 대과거-과거-현재-미래-먼 미래라는 선형의 시간 인식을 전제로 한다면, 인간이 인식하는 범위는 기껏해야 과거-현재-미래의 일부에만 걸쳐져 있다.

이런 인지능력의 한계는 결국, 객관적인 평가를 요하는 순간 극적으로 인간의 판단능력을 저해시킨다. 객관적인 평가의 전제는 많은 모수이다. 샘플이 많고, 그 샘플들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할수록 평가는 객관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인지능력은 제한적이고, 그래서 주로 가까운 과거의 기억에 가장 깊은 인상(=가중치)을 부여한다. 10년 전에 본 명작영화보다 어제 본 3류영화가 더 기억에 남는 경우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가치평가가 굉장히 객관적이라고 착각한다. 실제로는 사람들의 기억은 현재와 가까워질수록 가중평균될 가능성이 높다. 즉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를 플레이하기 전에 망작 게임을 연달아 플레이해 왔다면 평가가 높아질 가능성이 높고, 그 반대라면 평가가 낮아질 수 있다. 그래서 게임이나 영화를 막 즐기고 난 직후에는 웬만한 쓰레기가 아닌 이상 그 작품이 그래도 상당히 괜찮은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2-3일쯤 지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웬만한 쓰레기까지는 아니어도 그렇게까지 명작은 아닐 것임에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를 플레이한 직후 헐레벌떡 9점, 10점짜리 평점을 매긴 리뷰어들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라스트 오브 어스같은 게임은 전형적으로 후광효과나 밴드웨건 효과가 발동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 위대한 전작, 가장 핫한 소재라는 선악의 모호성까지 마치 좋은 게임이기 위해서 갖춰야 하는 것은 다 갖춘 듯한 모습이고, 지금 막 플레이를 마쳤으니 머릿속에서 전체 게임의 스토리나 게임성이 제대로 정리될 시간이 있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지금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에 높은 평점을 매긴 게임잡지들이나 리뷰어들은 전세계 게이머들로부터 조롱거리나 비난 대상이 되고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은 비단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사람들의 비판의 물결에 높은 평점을 줬던 리뷰어들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영화 <라스트 제다이>에 관객들의 혹평이 쏟아졌을 때도 고고한 평론가들은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과연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의 출시와 함께 발생한 '리뷰 사태'로 인해 리뷰어들이 게임을 평가하기 전 한 발자국 물러서 조금 더 시간을 들여야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평론가 vs. 대중

평론가들과 대중의 인식이 갈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특히 영화나 게임 같은 대중예술 장르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사례 중에는 영화 라스트 제다이에 대한 평단-대중들의 괴리와 위에서 말한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에 대한 평단-대중간의 괴리를 들 수 있겠다.

과거에는 평론가들의 평가에 대중들이 절대적인 위상을 부여하는 때가 있었다. 만일 평론가들이 위대한 영화라고 극찬하면, 대중들은 뭐가 위대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평론가 분들이 좋은 영화라고 하니 내가 보는 눈이 없는 건가 보다하고 반성하고는 했다.

그러나 최근의 두 사례에 비추어 보면, 평론가들의 좋았던 시절이 슬슬 끝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중들은 더이상 평론가들의 평론에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평론가들은 분명 해당 분야에 대해 일반 대중보다 많이 경험하고 다양하게 공부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말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라고 대중들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중의 반란

물론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명제는 상당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영화를 볼 때 카메라워크와 구도, 사운드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을 갖춘 채 이를 감상하는 것과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이를 감상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자의 방식에 의한 감상이 항상 후자보다 우월하다거나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화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늘 들려오는 얘기지만 예술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평론가들은 마치 영화를 감상하는 데 정답이 있는 것처럼 굴어왔다. 한껏 '예술적'이라고 자신들이 칭찬한 영화를 대중들이 깔아뭉개면 역시 대중들은 보는 눈이 없다며 수근거리거나 대놓고 그들을 모멸하기도 했다. 이제까지는 그러한 모멸을 받아온 대중들은 움츠러들었지만, 더이상은 아니라는 점이 최근 두 사례로 인해 증명되고 있다. 대중은 더이상 평단의 평론에 구속받지 않고, 오히려 '평론가들이 높게 평가하는 영화는 대중적으로 재미 없는 작품'이라고 인식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대중들의 지식 수준 상승으로 인한 각성? 교조적인 평론가들의 태도? 이에 대한 답이 무엇일지는 몰라도, 최근 저 두 사례로 인해 평론가들은 자존심을 구길 만큼 구겼을 것이다. 물론 그래도 평단과 대중의 괴리는 계속될 것이다. 만일 평론가가 평단의 권위를 내려 놓고 대중에게 다가오는 순간, 이미 그는 평론가로서의 가치를 잃고 직업도 잃게 될테니 말이다. 하지만 평론가도 결국은 직업인 만큼 대중들이 점점 평론가를 거부하는 지금과 같은 기조에서는, 평론가들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반응형

'일상의 기록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스테리에 대하여  (0) 2020.07.10
글쓰기와 광고에 대하여  (0) 2020.07.09
파맛 첵스와 민주주의에 대하여  (0) 2020.07.07
집값에 대하여  (0) 2020.07.07
PC함에 대하여  (0) 2020.07.0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