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즈를 잇는 국민시트콤
미국 드라마 중에는 뛰어난 시트콤들이 많기도 많다. 고학력 nerd들의 일상생활을 풀어내며 쉘든이라는 전대미문의 캐릭터를 낳은 <빅뱅이론>, 짜증스러운 상사와 함께하는 오피스 생활을 그려낸 <오피스>, 거칠고 위험한 형사생활을 재치 넘치고 독특한 캐릭터로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브루클린 나인나인>까지.
그러나 그 수많은 시트콤들 중에서도 국내 팬들로부터 단연 압도적인 인기를 끈 것은 바로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방영한 시트콤 <프렌즈>일 것이다. <프렌즈>는 제니퍼 애니스톤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함과 동시에, 한동안 성공적인 시트콤의 표본으로 자리잡았다.
<프렌즈>의 성공요인으로는 많은 것을 꼽을 수 있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 로스와 레이첼의 절절한 사랑, 20대부터 40대까지를 아우르는 폭넓은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평범한 소재와 배경, 2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웃기는 절묘한 펀치라인 등등.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렌즈>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랑받아온 가장 큰 이유는 <프렌즈>가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프렌즈>는 <빅뱅 이론>처럼 고학력자들이 사용하는 고급스럽고 어려운 과학 용어가 난무하는 드립을 이해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오피스>처럼 도저히 몸둘 바를 모르겠는 뻘쭘한 상황들을 강요하지 않으며, 때때로 목숨과 신체에 위협을 당하는 형사생활을 유머러스하게나마 옆에서 목도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프렌즈>의 미덕은, 이렇게 갈등의 상황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How I met your mother>(이하 "HIMYM")은 <프렌즈>의 가장 정통적인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쉽고 편하면 지루하다?
얼마 전 <은밀한 회사원>을 리뷰하면서, 그 시트콤이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로 <프렌즈>나 <HIMYM>이 그렇듯 어떻게 보면 판타지스러운 일상을 대강 무시하거나 생략하지 않은 채 현실의 날것을 드러내 보여주면서도 블랙유머를 잊지 않는다는 점을 거론한 적이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고 싶은 부분은, 결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은밀한 회사원>이 저 두 시트콤보다 낫다고 주장한다거나 두 시트콤의 작법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단 <은밀한 회사원>은, 기존의 TV 드라마에서 대강 뭉뚱그리고 넘어간 부분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 한창 이뤄지고 있는 2021년에 태어났다. 남자만 주역으로 제시되는 영상물도, LGBTQ의 존재를 몰각한 영상물도, 딱히 잘못한 것 없이 어떤 장르의 고식적인 플롯에 맞춰 제작된 영상물도 전부 게으르거나 잘못됐거나 몰지각하다고 비난을 받는 세상이다. 이 시대의 영상물은 기존의 영상물과 무언가 달라야 한다(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평론가들이며 업계 종사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는 의미이다). <은밀한 회사원>은 그러한 기조 하에 태어난 작품이고 나름의 재미가 있다.
하지만 모든 작품이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작품이 기존의 틀을 박살내거나 기존의 작품들이 홀시했던 부분을 파고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 하의 현대예술품들이 바로크 시대의 예술품보다 '나은' 것은 아니듯 그냥 기존 틀을 깨부수는 작품은 작품대로 기존의 틀대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그대로 의의가 있을 뿐이다. 마블의 히어로물이 잘빠졌다고 해서 팀버튼의 배트맨이 망작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쉽고 편한 시트콤은 쉽고 편한 시트콤대로, 뭔가 복잡하거나 꼬인 시트콤은 꼬인 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이 러브 프렌즈!
그런 면에서 <HIMYM>은 확실히 최근의 풍조와는 다른 시트콤이다. <HIMYM>은 <프렌즈>가 깔아놓은 정석적인 시트콤의 판을 깨려고 시도하거나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대신 <HIMYM>은 <프렌즈>가 보여준 기술들을 좀더 갈고닦아 세련된 형태로 제시한다. 좀더 개성있는 캐릭터들, 쉴새없이 터지는 티키타카, 거의 완벽한 복선 깔기와 회수, 매 화마다 들려주는 따뜻한 인생의 교훈들.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관객은 <HIMYM>의 사랑스러운 인물들과 친구가 된다. 인물들에 대한 디테일한 탐구는, 극이 끝날 때쯤이면 관객들이 마치 현실의 친구같이 <HIMYM>의 캐릭터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시청자들은 이 극이 끝날 때 쯤이면 거의 현실의 친구같아진 테드, 바니, 마셜, 로빈과 릴리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프렌즈>가 만들어낸 공식(주역 인물은 6명 이내로, 주역 중 일부는 커플로, 주역 중 한두 명 정도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트릭스터 - 프렌즈의 경우에는 조이, HIMYM의 경우에는 바니 - 로 설정할 것, 특정 상황에 처했거나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 공감할 수 있는 특수한 직군의 특별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일상적인 사람들의 일상적인 배경을 다룰 것)을 훌륭하게 갈고닦아낸 <HIMYM>은 국내에서도 다시 한 번 잔잔한(?) 인기를 얻게 된다.
참고로, 최근에는 <HIMYM>의 외전이라고 할 수 있는 How I met your father이 제작 중이다.
총평
이 시트콤은 자기 전 한 편씩 보기 좋다.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든 친구들의 바보짓을 담은 옛날 사진과 동영상을 돌려 보듯 돌려 보기 좋다. 이 시트콤은 시청자가 현대의 사회문제에 대해 고민하거나 PC에 대해 고뇌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일반 시청자 대상 추천 지수는 ★★★★. 당신이 무엇을 하는 어떤 사람이든 이 시트콤의 인물들을 사랑하지 않기는 힘들다. 다만 마지막 시즌은 안 보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엔딩이 뭔가뭔가이기 때문이다...
닐 패트릭 해리스의 팬 대상 추천 지수는 ★★★★★. 이 시트콤은 누가 뭐래도 <천재소년 두기>로 유명한 닐 패트릭 해리스, 소위 NPH의 최고 정점 작품임이 분명하다. NPH는 이 작품을 통해 미국 시트콤의 역사에서 영원히 회자될 바니 스틴슨이라는 인생 캐릭터를 얻었다.
현실주의자 대상 추천 지수는 ★★. 극은 현실의 반영이어야 하고 대충 넘어가는 해피엔딩 따위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행복한 시트콤은 좋은 선택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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